Tuesday, July 31, 2018

대형 교회의 문제점

지금 한국 교회 (이민 교회 포함)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너무 교회 내부적인 것에 치중하다보니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교회 내부의 문제들이 밖으로 노출되면서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평신도 지도자들도 책임이 있다. 교회 리더십의 총체적인 위기이다. 

이러한 논란의 중심은 대부분 대형교회들이다. 그러나 대형교회가 스파트 라이트를 받기 때문이지 작은 교회라고 무조건 다 건강하다고 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형교회는 일종의 백화점이다. 모든 연령대의 신자들에게 필요를 채워준다. 젊은 부부들에게는 비슷한 연령층과 교제할 수 있고, 아이들이 신앙교육을 받을 수 있다. 어르신들은 시니어대학을 통하여 다른 어르신들과 교제할 수 있다. 좋은 예배당과 세련된 찬양, 강해 설교등으로 인하여 주일예배가 지루하지 않고 은혜롭다. 이런 여러가지 혜택을 받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대형교회를 떠나서 작은 교회로 갔던 분들이 다시 대형교회로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작은 교회는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더 상처를 주기 쉽다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할 이유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장점을 살리면서 몇가지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대형교회가 가진 문제점을 몇가지로 정리해보면
  1. 대부분의 대형교회가 물질적, 인적 자원을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주로 교회 성장과 땅끝 선교에만 주력하다 보니 실제로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여러 대형교회들이 같이 교단이나 연합회를 통하여 서로 자원을 합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 선다면 지역사회의 불신자들이 교회를 칭송하게 되고 교회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홈리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큰 교회들이 힘을 합쳐서 앞장 선다면 사회적인 영향력이 증가할 것이다.
  2. 비슷한 맥락에서 극단적 개교회 주의가 문제의 핵심이다. 각 교회마다 '우리' 담임목사, '우리' 성가대, '우리' 찬양팀, '우리' 예배당, 등 모든 초점이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잘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많은 성도들이 담임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행동한다. 교회끼리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지나친 경쟁의식이나 개교회 주의는 교회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3. 선교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 선교는 곧 땅끝 선교로 생각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것, 또 단기선교팀을 내보는 것이 선교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교인은 1%정도이고, 단기선교로 나갈 수 있는 교인은 10%정도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90%는 선교비를 지원하거나 선교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는 것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만약에 선교의 개념을 모든 신자들이 자신의 삶속에서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모든 성도들이 선교사가 될 수 있고, 그러한 교회는 곧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다.
  4. 신자들의 이원론적인 삶이 문제이다. 선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즉 비신자들이 볼 때 신자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삶에서 배어나오는 것이지 전도폭발이나 고구마전도와 같이 말로 하는 전도가 아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읽고 믿지만,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삶을 보고 믿는다. 그러므로 선교적인 차원에서 신자들의 교회밖의 삶이 교회안의 삶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을 보면 촛점이 교회밖의 삶보다 교회안의 삶에 맞추어져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원론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교회안의 삶과 교회밖의 삶이 다르다는 것이다. 교회안에서는 교회에서 훈련받은 대로 살지만, 교회밖에서는 세상에서 터득한 세상적인 방법, 소위 요령으로 살아간다. 때로는 세상적인 방법이 교회안으로 들어와서 다단계 판매나 돈거래가 이루어지고 돈을 갚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을 하는 신자들도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신자들에게 교회밖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권면하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5. 교회내부의 모습이 새신자들에게 선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전도를 하여 교회로 새신자를 인도해왔더라도 새신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새신자들에게 보여지는 교회의 모습이 긍정적이지 않으면 새신자는 상처를 받고 교회를 옮기거나 아예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된다. 이것이 요즘 소위 '가나안'('안나가'를 거꾸로 한 말) 교인들의 문제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성경은 좋은 데 교회는 싫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대개 교회의 목회진과 평신도 리더십의 문제이다. 교회의 리더들이 겸손하고 헌신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로 보여지면, 새신자들도 교회에 잘 정착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6. 교회의 구조가 교회를 오래 다닐 수록 기득권이 늘어나게 되어있다. 특히 제자훈련이나 직분이 그러하다. 그런데 그러한 구조가 교회에 대한 충성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보다 앞세우게 되어 개교회주의를 더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개교회에 충성하는 것만이 교회에서 대우받는 방법이고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은 오히려 개 교회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카톨릭 교회나 감독이 있는 감리교는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단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단기적으로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개혁의 방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방향 제시는 나중에 다시 정리를 하려고 한다.

성경적 세계관?

성경적 세계관은 처음에는 매우 관심이 가는 분야이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계가 진보/보수, 좌파/우파로 나뉘어 많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에서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보면서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개념에 회의가 생겼다. 성경적 세계관은 세상을 성경적으로 보는 색안경과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을 해석하기에 따라서 빨간색으로도 보고, 파란색으로도 본다면, 결과적으로 누구의 색안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세계관이 달라진다. 북한의 핵문제, 남북통일, 경제 정책, 노동 정책, 동성애 등 많은 문제들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시각이 달라서 극과 극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성경적이라고 가르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진보적 세계관, 보수적 세계관 등 여러개의 세계관중에 어느 것이 성경적 세계관인지는 각자 선택해야 할 것이다. 천년왕국에 대하여 여러가지 '천년설'이 있어서 각자 믿음에 따라서 선택하여 믿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2천년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고 독립시켜 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정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 권세를 모두 버리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 또 부활하신 후에도 유대인의 왕으로 통치하시지 않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기독교인이 세상을 보는 세계관도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을 통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미와 아직'중에 '아직'에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아직 재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매우 불완전하다.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이 아직 성화되지 못하여 죄인의 모습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어 세상이 점점 좋아진 후에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천년왕국설이 후천년설이다.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조로 인하여 이러한 설이 한때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가 6백만명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등,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러한 긍정적인 사조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후천년설 지지자들이 지금은 무천년설을 지지한다고 한다.

성경적 세계관도 기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부분에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이다.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주위의 안믿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정책적인 차원에서 기독교가 로비활동등 시민사회단체 운동을 한다면 결국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분열될 수 밖에 없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다. 이미 많은 분야에서 기독교 보수단체와 진보단체가 각각 존재하며 같은 이슈에 대하여 전혀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교회연합회가 진보쪽은 NCCK, 보수쪽은 한기총과 한교총등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상반되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기독교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신뢰도의 회복이다. 기독교가 카톨릭이나 불교보다 월등히 낮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다. 신뢰도가 낮은 이상, 전도와 선교는 힘들어지고, 자연히 교인들의 숫자도 줄어들고, 특히 젊은이들을 잃어서 교인들의 노령화가 급격히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영향력도 낮아질 것이다. 얼마전에 대형교회의 부목사가 불륜을 저지른 것이 공개되어서 해임되었다. 또 최근에는 그 교회의 유명 장로가 횡령, 배임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기독교의 여러가지 비리가 교단, 교회, 목사, 장로등 여러 차원에서 미디아에 보도될 때마다 기독교의 신뢰도는 더 내려갈 것이고, 젊은이들은 더 교회를 멀리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는 노인들만 남을 것이고 주일학교도 운영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이미 많은 작은 교회들이 이러한 노령화로 인하여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성경적인 세계관을 강조하려고 하다가 진보/보수, 좌파/우파로 분열되기 보다는, 다같이 연합하여 기독교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할 때이다.

선교적 성도, 선교적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문제이다. 오직 나 혼자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내가 복음을 받아 들이는 순간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철저하게 이타적인 삶을 사셨다. 기회가 되는 대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제자와 군중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심지어는 허기진 군중들을 먹이시기까지 하셨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되면서 자연히 이웃을 위한 삶이 된다. 만약에 나의 삶을 돌아볼 때 그렇지 못하다면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타적인 삶을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영혼의 문제와 육체적인 문제를 모두 포함한다. 예를 들어서 병자나 허기진 사람들에게 복음만을 전할 수는 없다. 우선적으로 그 병을 고쳐주고 허기진 배를 채워준 다음에 복음을 전하여 육과 영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 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회복음을 외치고,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개인 구원만을 외치는 것은 예수님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양쪽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문제 - 예를 들어서 홈리스 문제 - 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직접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NGO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이유는 종교적인 색채를 제거함으로 해서 불신자들과 같이 합력할 수 있고 불신자들과 접촉하면서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다. 또 세상의 자원을 정부, 지자체, 기업등으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가 모든 재정적인 부담을 지지않아도 되고 더 큰 사역을 할 수 있다. 

복음의 가장 기본은 선교이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목숨을 걸고 한 사역이 선교이다. 물론 모든 신자들이 바울과 같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 요즘 신자들의 문제는 불신자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이 교회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물론 같은 신앙의 동료들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그러나 삶의 100%를 교회 관련된 신자들과 보낸다면 선교의 기회가 전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러라도 불신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한가지 방법이 NGO활동이다. NGO는 종교적인 색채를 배제하고 사회적인 나눔을 위하여 만들어진 단체이다. 이러한 단체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 자연히 불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과 합력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불신자나 다른 종교인들에게 심어 줄 수 있고, 또 전도의 씨를 뿌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당장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를 하는 것보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면, 선한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이미 복음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이러한 관계 전도가 전도폭발이나 고구마전도와 같이 말로 하는 전도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이렇게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 밖에서 선교적인 삶을 살게 되면, 교회도 선교적인 교회로 자연히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예배당과 같은 건물이 아니다. 또 담임목사나 목회진도 아니다. 교회는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를 만들려면 결국 모든 신자들이 선교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모든 신자들에게 개교회에만 충성하라고 가르치고, 모든 신자들이 100% 교회안에서만 활동하게 되면 선교적인 삶을 살 기회가 그만큼 없어진다. 단기선교등 선교의 기회가 있지만 그것은 몇년에 한번, 일주일 정도밖에 안되는 매우 짧은 기간이다. 일년 365일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결국 일상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묻어나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연히 삶에서 어떻게 성경대로 살아가야 하는 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교도소안에 있는 사람들중 기독교 신자의 퍼센트와 교도소밖의 신자의 퍼센트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교회안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이 직장안에서 직장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남성들이 그렇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교회에서 자신의 유익이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적응력이 점점 좋아진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church politics)에도 익숙해 진다. 이러한 오래된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새신자들에게 큰 은혜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새신자들이 또 다른 교회로 이동하거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가나안'('안나가'를 거꾸로 한 것) 신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오래된 신자들일수록 교회안과 교회밖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줄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그것만이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는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인수의 감소와 재정의 감소는 계속될 수 밖에 없고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대형 교회의 문제점

지금 한국 교회 (이민 교회 포함)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너무 교회 내부적인 것에 치중하다보니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교...